‘의미 없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서사
이필(미술사/미술비평)
사진, 영화, TV와 컴퓨터 화면, 거리의 광고판에 수많은 이미지가 넘치는 ‘이미지 포화’의 시대, 이미지는 우리 삶의 전부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닐 만큼 가볍기도 하다. 디지털 세대인 정주원은 무작위적이고 비선형적으로 부유하는 가벼운 이미지와의 만남에 익숙하다. 그것은 일순의 접목일 뿐, 이미지는 어느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스쳐간다. 미디어 이미지뿐만 아니다. 스펙터클한 한국 사회에서 길을 걷는 작가에게 길거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사물과 풍경도 부유하는 이미지이다. 이미지도 떠돌고 작가도 떠돈다. 작가는 스치는 이미지 중 어떤 것에 끌린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부유하는 이미지를 그림 속에 머물게 한다.
정주원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가벼운 이미지는 기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실재와 실존의 무게를 덜어버림으로써 더 가벼워진다. 일상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은 <이미지 채집>같은 작고 단편적인 소품 시리즈가 되고, 그 소품들은 언제라도 느슨하게 모이고 흩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4미터 길이의 삼면화 대작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그 선택과 조합의 법칙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혼동의 세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정주원의 작품 세계에서 광고용 풍선이나 잡초 같은 작고 사소한 사물과 일상적인 풍경은 ‘보이는 것’이 되어 일상에서 느끼는 사랑, 대화, 질투, 증오, 집착,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폭력, 이질적 세계의 충돌과 껄끄러움 등 ‘안 보이는 것’을 암시한다. 가시적인 이미지들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기 최면 등 추상적인 감정표현의 복선을 이룬다. 이러한 감정은 <알록달록한 중압감>, <위태로운 작은 별>, <애매한 추상>, <지켜야 할 것>이라는 일기 같은 제목에서 나타나고, 그림 곳곳에 삽입된 단어나 문구,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뾰족한 수 가 없네,” “We don’t talk anymore,” “말해야 하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는 없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러한 문구들은 작가가 일상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 체념, 관계의 껄끄러움 등에 관람자를 이입한다. 그러나 이 문구들은 말놀이 같은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러한 말들을 쓰는 상황의 육중함은 사그라든다. 정주원의 그림 속세계에서 이미지도, 말도, 작가도 부유한다.
젊은 작가로서 작업한다는 것과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의문이 “무의미-의미-무의미-의미” 혹은 “나는 잘 모르겠어요.”와 같은 문구에서 나타난다. 정주원은 이전에 주제를 가지고 작업할 당시 스스로가 자신의 작업을 복제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작가의 자기복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정해진 주제 없이 그냥 순간순간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로 했다. 임의적으로 수집한 사소한 이미지는 정주원의 자의적 서사 만들기 놀이의 재료가 된다. 작가는 채집한 이미지들을 마치 파편을 주워 모으듯 배열한다. 서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는 세 가지 유형이다. 풍성한 선 드로잉의 느낌을 주는 펜화, 백토위에 홍분과 과슈로 그린 몽롱한 느낌의 홍록색 그림, 그리고 백토위에 동양화 물감과 아크릴로 그린 삼면화 대작이다. 보통 서사는 삶에 대한 응축된 이야기이다. 글로 쓰인 서사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이해해야하는 시간 예술이라면, 회화적 서사는 2차원적 화면에 시공이 압축될 수밖에 없다. 정주원의 그림에서 단편적 이미지들이 화면위에 배열되는 과정에서 각 이미지들이 담고 있던 기존의 이야기는 변환되며, 작가의 결핍과 욕망을 전달하는 자의적 서사 만들기의 수단이 된다. 발화자는 청자와 소통을 꾀한다. 작가는 본인만의 서사를 통해 바깥의 서사와 만나기를 희망한다.
광목에 백토를 발라 그린 정주원의 그림은 광택 없고 말간, 빛바랜 탁본 같은 느낌을 준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는 <얼굴들>과 <흩어지는 인물>도 쓸쓸하고 희미하고 어스름하다. 허상 같은 그들의 존재도 금방 사라질 듯 작가의 삶 주변에 부유한다. 광택 없고 빛바랜 느낌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작가도 작고 느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존재이건, 사물이건, 우리 삶에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묻는 작가의 그림에는 소심해 보이면서도 느린 단호함, 수줍은 듯 하면서도 진중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체념적인 뻔뻔함이 공존한다. 정주원의 작업은 밀란 쿤데라의 하찮고 의미 없는 것은 존재의 본질이라는 메시지를 공명한다. 의미 있는 삶의 사건을 무의미하다고 부르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